자나 깨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던 애국심으로 보거나 두 분은 많이 닮은 점이 많다.
그것은 광주에서의 시민학살 책임에 대한 단죄의 의미를 함께 담는다.그러나 그 둘은 경쟁자들을 이러한 문제로 처벌하지 않았다.
한반도 비핵평화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지금 우리는 극단적인 진영대결과 승자독식 민주주의의 망국적 폐해를 절감하고 있다.그렇다고 하여 개척자의 기여가 축소되거나 완성자의 성취가 독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내 후보 경쟁.문민정부 30주년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 평가가 아닌 것이다.
검찰의 정치개입과 사법주의를 넘어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의 정상 절차를 보장한 결단이었다.사태를 악화시킨 청의 개입 청에는 책임이 없었는가? 동아시아에는 수백 년 동안 조공관계가 지속하였다.
이렇게 구한말의 역사는 하나의 원인에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했다.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 대한 개입.일본은 새로운 개혁을 위한 모델이었다.